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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캘린더

[역사캘린더]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by 이꼬마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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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5.18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이꼬마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역사는 5.18 민주화운동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광주민주항쟁이라고도 불리며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 시민을 중심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 퇴진을 요구한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12.12 군사정변을 계기로 발발되었습니다. 아래의 게시글을 통해 12.12 군사정변에 대해 가볍게 보시면 이번 게시글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12.12 군사정변에 대해서

 

[역사 캘린더] 12.12 군사정변에 대해서

안녕하세요 이꼬마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역사는 12.12 군사정변입니다. 12.12 군사반란, 12.12 숙군 쿠데타, 12.12 군사정변이라 불리는 사건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대 내 사조

allofmyinfo.tistory.com


광주 시민들은 신군부 세력, 즉 전두환의 세력들의 장악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민주화의 역행에 대해 대규모 시위를 했으며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제압하였습니다.

공수부대를 투입한 신군부 세력은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습니다. 이후 시민들은 무장을 하게 되었으며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지속적인 교전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후 군부세력이 정치권을 장악하여 대한민국 내 언론을 통제하여 세계에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있다가 독일 기자인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참상을 세계에 처음 알렸습니다.

1995년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생기면서 희생자에게 보상 및 희생자 묘역이 생겼습니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여 대한민국에서 매년 정부 주관 기념행사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1. 5.18 민주화운동 발발 계기

육사 11기 생도시절 전두환과 노태우
육사 11기 생도시절 전두환과 노태우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 전두환은 하나회를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을 조직하여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실권자로 오르게 됩니다.

12.12사태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시려면 아래의 게시글을 확인해주시길 바랍니다.

12.12 군사정변에 대해서

 

[역사 캘린더] 12.12 군사정변에 대해서

안녕하세요 이꼬마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역사는 12.12 군사정변입니다. 12.12 군사반란, 12.12 숙군 쿠데타, 12.12 군사정변이라 불리는 사건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대 내 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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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초부터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K-공작 계획을 실행하여 언론을 통제하였으며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자리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한민국 내의 정보기관을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이러한 군부세력의 장악은 시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펼치는데 기화제 역할을 하였습니다.


2. 민주화운동의 시작

당시 광주 민주화운동 사진
당시 광주 민주화운동 사진

1980년 신군부가 정치에 관여하는 움직임을 보이니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전국 곳곳에 발발하였습니다.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와 개헌 논의를 비롯한 정치 현안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신군부 세력은 정국 운영에 방해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였습니다.

계엄 포고령 10호를 선포하여 정치활동 금지, 휴교, 언론 보도검열을 하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정국운영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감금하고 군 병력으로 국회를 봉쇄시켰습니다.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5월 18일에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비상계엄 해제 등을 외치며 시위하였습니다.

신군부는 부마민주항쟁처럼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거라 판단하였지만 이는 오산이었습니다.


3. 대학살의 시작

계엄령선포로 특수부대에게 진압 당하고 있는 광주시민
계엄령선포로 특수부대에게 진압 당하고 있는 광주시민

5월 18일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닌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들까지 살상, 폭행하였습니다.

이를 본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끼며 10대 청소년부터 중장년층까지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여하며 부마항쟁처럼 끝날 줄 알았던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습니다.

광주 시위대의 격렬한 저항에 계엄군은 5월 21일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후 철수하였습니다.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으로 차량 통행자나 지역 주민들이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5월 27일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통해 무력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하였습니다.

10일에 걸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사망자 166명, 행방물병 54명, 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 끔찍한 참사로 변하였습니다.

계엄령 선포 이후 호남지역에선 신군부세력과 그의 우두머리인 전두환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높아졌습니다.


4. 공수부대 진압 타임라인

공수부대 진압 당시 사진
공수부대 진압 당시 사진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진압병력 투입을 강경하게 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계엄 전국 확대와 동시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대를 진압하여 계엄 지침이 즉각 실행될 것을 전제로 시작하였습니다.

5월 15일 제7 공수여단은 대전에서 광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후 5월 18일 시위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시위진압이 목적이 아니라 체포 목적이었기 때문에 과격 진압이 발생하였습니다.

5.18일 타격과 함께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하였으며 광주 시민들 중 총기를 들고 대응하는 사람들은 불순자, 간첩이라 규정하며 체포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이렇게 사태가 확산된 것은 고정간첩과 불순인물들이 극적인 상태로 선동하며 유언비어 등 공공시설 파괴와 방화, 장비, 재산약탈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하며 선동, 난동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실제로 5.18 민주 시위자 중 일부는 경찰서와 무기고 등을 습격하였으며 방송국, 도청 등을 점령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간첩들과 민주시민이 섞이는 바람에 현장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 또는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했으며 이러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공수부대원들이 피아식별이 불가능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폭력적이고 가혹한 진압을 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5. 5.18 광주항쟁, 광주학살, 광주사태에서 5.18 민주화운동으로

재판을 받는 김영삼과 전두환
재판을 받는 김영삼과 전두환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화 직후인 1988년 3월 24일 노태우 정부가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면서 바뀌었습니다.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제5 공화국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김대중의 사주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왜곡했습니다. 1988년 제 5공화국 비리 청산과 함께 국회 광주진상특위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조사가 다시 이루어졌습니다.

1997년 대법원에서 5.18 사태, 12.12사태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공식적으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책임자로 전두환, 정호용, 이희성, 황영시, 주영복 등을 판시하였습니다.


6. 5.18 광주 민주화운동 영향 및 평가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
가 되었습니다.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향한 의지를 나타내었으며 군사독재의 폐해를 세계에 알림으로 군사독재체제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은 한지역에서만이 아닌 전국적인 저항으로 될 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유혈로 통한 아픈 교훈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유네스코는 광주민주항쟁은 1980년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필리핀, 태국, 베트남, 중국 등 아시아의 민주화 운동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했습니다.



7. 광주 민주화운동의 또 다른 해석

광주 민주화운동때 광주시민의 무기들 폭약과 기관총이 즐비되어 있다.
광주 민주화운동때 광주시민의 무기들 폭약과 기관총이 즐비되어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 군사정부가 장악하면 안 되지만 전쟁 발발 이후 수많은 간첩들과 북한과 한국의 신경전은 극에 달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혼란스러운 국내 정세를 강한 정부가 잡지 못하면 북한에서 공격할 것이라는 미국의 정보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에 광주시민들이 수동적으로 행동하며 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칫 광주시민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전남 도청에 지휘부를 만들고 주변의 무기고를 털어 교도소를 습격했으며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해 집단적인 게릴라를 펼쳤습니다.

광주 시위대 중 일부는 기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와 군용차를 강제로 탈취했으며(약 370대) 광주와 전남지역 무기고 38곳을 4시간 만에 습격하여 총 5403정, 탄약 약 28만 발, 다이너마이트, 폭약 2500여 상자 등을 탈취하고 계획적인 시위(?)를 펼쳤습니다.

무기고 탈취, 지휘부 설정 등 이러한 행동이 빠른 시간 안에 진행이 되었다는 것은 조직적으로 누군가의 지령이 있었으며 이에 현혹된 광주, 전남시민들이 절대적인 피해자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칼빈 소총을 들고 군복을 입은 시민
5.18 당시 칼빈 소총을 들고 군복을 입은 시민

참고사진은 신군부 세력의 공수부대 군인의 사진이 아닙니다. 머리스타일과 군복은 통일성이 없으며 총 또한 칼빈소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시민들을 제압하고 있습니다. 아마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특수부대, 공수부대인지 피아식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행동은 상당한 조직력과 무장력, 정보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을 하며 발전된 것이 아닌 어떠한 지도부를 통해 미리 계획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민주주의 꽃이라고 불리며 광주민주화운동을 대한민국의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며 5.18 유공자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하여 많은 혜택을 주고 있지만 5.18 유공자에 대해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5.18 유공자는 5769명이 명단에 올라가 있지만 과거 군민정부에 대해 떳떳한 민주화운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단을 공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해마다 유공자가 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많이 들고 있습니다.

5.18유공자와 6.25일반참전용사 처우 비교
5.18유공자와 6.25일반참전용사 처우 비교

6.25 일반참전용사들은 기사에서 빈번하게 접하듯 생활고로 어려우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에 비하여 5.18 유공자는 혜택이 너무 많다는 의견도 다수 있습니다. 또한 대학 진학과 취업 등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이러한 국가유공자를 선별하는 과정과 명단에 대해서는 깨끗해야 하며 명단을 공개해야 이전 광주시민, 전남시민들의 무고한 희생에 흠집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후 몰상식한 사람들이 본인들의 욕심으로 혜택 받기 위해 5.18 민주화운동을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정보였습니다.
지금의 민주주의 대한민국에 살 수 있게 해준 선대들의 희생에 감사드리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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