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꼬마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역사는 10.26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건입니다.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흥주, 박선호, 경비원들과 공작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차지철 경호실장, 정인형 대통령 경호처장, 안재송 대통령 경호부처장, 김용섭 대통령 경호관, 김용태 대통령 경호실 차량운행계장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에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에서 차지철, 김계원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습니다.
연회중 박정희 대통령의 머리와 가슴에 김재규가 총을 발사했으며 박정희는 곧 국군 서울 지구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사망하였습니다. 피격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62세였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정권을 위해 지속해서 힘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김재규는 자유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위헌적으로 국회를 해산시켰던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였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선 김재규가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이며 권력 암투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일으킨 범죄이다라는 이야기와 1972년 유신정권 선포 이후 장준하와 함께 쿠데타를 준비 중,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추진과 박동선의 코리아 게이트 사건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가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의 시해를 은밀이 조정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10.26 박정희 피격 사건 전개과정
1.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정책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을 통해 한미관계에서 좋은 혜택을 누리고 있었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은 닉스 독트린은 미군 철수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박정희는 동맹국들의 미국 부담감축 방침에 대해 반대하며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닉슨 대통령을 찾아가 군사감축과 평화협상에 대해서 하나국 정부와 긴밀히 협의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미국은 주한미군 1개 사단을 철군하게 됩니다.
당시 북한과 한국은 정세가 어지러웠으며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으며 주한미군 감군 시기가 71년 봄 선거 기간과 일치했기 때문에 주한미군 감군은 박정희에겐 악재로 다가왔습니다.
1972년 7월 4일 박정희 정부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북한에 파견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을 비밀리에 합의하며 북한군 남침 위협을 막는 시간을 벌었습니다.
동시에 주한미군 철수를 강행하려는 미국 정부의 뜻을 바꾸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하며 미군이 철수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자주국방력을 대폭 증가시켰습니다. 이때 대한민국의 핵무기 개발이 처음 시도되었습니다.
2. 자주국방 정책의 반대세력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정책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일관했습니다. 재판에선 박정희의 대한민국 자주국방 실현은 잠꼬대에 지나지 않다며 비판하였습니다.
1979년 김재규는 미국 CIA와 긴밀하게 교류하였으며 CIA 한국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는 김재규와 골프를 즐기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3. 청와대 내의 파벌
박정희 대통령 때 청와대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경호실장 박종규, 보안사령관 김재규가 실세였습니다. 김재규의 라이벌인 육군방첩대장 윤필용은 1965년 5월 원충연의 쿠데타 모의를 적발하였으며 간첩을 잡는 등 대통령의 엄청난 신임을 얻게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측근들을 적당히 경쟁시키며 서로 견제하게 만들어 권력을 관리했습니다.
육사 8기인 윤필용은 육사 2기인 김재규가 자신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헌병대를 동원하여 수경사 영내의 보안대 사무실을 폐쇄하고 도청 테이프를 압수하며 김재규는 6 기수 후배인 윤필용에게 망신을 당합니다.
이후 김재규는 보안사령관에서 해임되어 강원도 최전방 산골에 있는 3 군단장으로 좌천되며 이후 군을 떠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윤필용은 군대 내의 신임을 받게 되며 1983년 그가 지원하던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 등 하나회의 핵심인 육사 11기들이 모두 장성으로 진급하며 윤필용은 하나회의 대부로 불리게 됩니다.
그 뒤로도 보안사령관 강창성,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사령관 윤필용,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 국방부 장관 서종철은 서로 파벌싸움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윤필용도 박정희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이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해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과 벌금 2000만 원, 추징금 590만 원을 선고받게 됩니다.
하나회의 대부인 윤필용이 재판을 받게 되니 하나회 측 장성 3명, 장교 13명이 징역형을 받으며 윤필용 측근들은 좌천당했습니다. 24명의 인사이동과 160명이 감시대상으로 분류되며 윤필용과 가깝게 지내던 한양대 총장(대한일보사장) 김연준도 구속되었습니다.
하나회의 중심주축인 육사 11기와 친하게 지내던 제일은행 이원조 차장은 해임되었습니다.
4. 김재규의 주변 평판
김재규는 자존심이 강하며 섬세하지 못해 정보업무를 다루기엔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평가받았으며 대부분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뤘습니다.
이미 후배인 윤필용에게 도청하다 걸려 망신을 당하였고 박정희 대통령도 이러한 여론을 인지했으나 주변에 자신을 믿는 인재가 없었습니다.
차지철 또한 김재규보다 8살이나 어렸으며 윤필용, 손영길의 쿠데타 모의 음모를 통해 주변 인재들을 잃었으며,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으로 박종규 경호실장도 떠났습니다.
우수한 인재들이 파벌 속에 하나둘씩 사라져 가다 보니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건설부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습니다.
5. 장준하의 실패한 박정희 정권 쿠데타 기획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던 김재규는 쿠데타를 7년간 준비해왔으며 장준하의 '8월의 거사'에도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준하의 '8월 거사'는 광복 30주년이 되는 1975년 8월 15일에 맞춰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쿠데타였습니다. 김대중, 함석헌, 홍남순과 같은 정치인들 뿐만 아닌 군인 세력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75년 7월 29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장준하가 '8월 거사'를 진행할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장준화와 밀담을 했던 것은 인정하였으나 쿠데타나 대통령 암살 계획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위의 기획의 내용으로 보아 김재규의 암살 동기는 단순 우발이 아닌 유신정권에 대한 반감으로부터 준비했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6.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계획,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그날 일정을 소화한 뒤 중정정보부 소속의 안가에서 만찬을 즐기기로 했습니다.
차지철에게 이러한 정보를 받은 김재규는 수행비서관이었던 박흥주와 남산의 부장실을 출발하여 윤병서 비서를 데리고 2층 부장 집무실로 올라갑니다.
김재규는 사무실 금고에서 총을 꺼내 실탄을 장전하고 고장유무를 확인한 뒤 서가 뒤에 숨겨 놓습니다.
오후 5시쯤 김재규는 라이터 주머니가 큰 양복바지를 요구하였고 식사 3인분을 준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로 들어오고 김재규도 바지 주머니에 총을 숨긴 채 박정희와 대면하였습니다.
한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인 박선호는 하루 전 섭외해둔 모델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을 만찬 장소로 데려왔습니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 김재규와 함께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이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 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2차 장보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총을 점검하는 순간 차지철이 나타났지만 그 모습을 본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김재규는 박선호에게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 대통령 경호부처장 안재송을 처단하고, 박흥주는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 당신을'을 부르는 중 밖에서 돌아온 김재규가 자리에 앉자마자 '건방져'라는 고함과 함께 발터 PPK 권총을 꺼내 두발을 쏘았습니다.
첫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에 맞았으며 두 번째는 박정희의 가슴에 맞았습니다.
총소리를 혁명의 시작이라 느낀 박선호는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쐈으며 박흥주도 경비원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들을 죽였습니다.
차지철이 박정희 대통령의 안부를 묻자 괜찮다고 하였지만 경호원을 부르려고 나가자마자 박정희 대통령은 상체가 쓰러졌고 그 이후로 대답이 없었습니다.
김재규는 다시 들어와 차지철의 폐와 복부에 총을 쏘았으며 박정희 후두부에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부축하던 심수봉을 향해 총을 겨눴으나 총알이 떨어져 쏠 수 없었고 신재순과 심수봉은 도망갔습니다.
김재규는 박정희를 암살한 후 정승화와 김정섭과 함께 육군본부로 향했습니다.
7. 김재규의 체포와 사형 집행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는 김진기에게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으며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김재규를 조사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김재규는 1980년 군 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내란수괴미수,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 증거은닉, 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80년 5월 24일 박선호, 유성옥, 이기주, 김태원과 함께 서울 구치소에서 사형당했습니다.
김재규의 최후 변론에서 했던 이야기입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8. 김재규의 암살 후 집권계획
피의자 조서 내용에 대통령만 제거하고 현장에서 자살하거나 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었을 텐데 김재규는 "본인이 살아남아야만 대통령 제거 이후의 혼란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 뒷설거지를 하고 본인의 구상대로 통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대통령 시해 후 주도권을 장악한 적임자는 누구라고 생각했냐는 질문에 "적임자는 본인뿐이라고 생각"이라 이야기하였습니다.
사태를 수습한 후에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여 대통령 출마 후보자는 국무총리 최규하를 뽑았으나 상황에 따라서 본인도 출마하려고 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이라 말했지만 결국 쿠데타를 통한 본인의 정권욕심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9. 김재규와 미국 배후
미국정부의 비밀문서들이 부분공개 되었습니다. 10.26 사건 며칠 전 김재규가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심지어 글라이스틴 대사가 10.26 사건 당일 김재규를 만났던 사실을 숨겼으며 김재규는 재판 도중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라는 발언을 했었습니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은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하였습니다. 박정희 암살 당시 만났던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 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한발 물러놨습니다.
미국은 김재규의 살인혐의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다고 일관하며 공개적 이슈가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김재규가 미국의 정치에 이용당하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습니다.
10. 10.26 사건의 여파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후 하나회를 중심으로 다시 군부정권이 들어오게 됩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인데 이는 우리가 흔히 아는 12.12 군사정변입니다. 아래의 포스팅을 통해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사 캘린더] 12.12 군사정변에 대해서
안녕하세요 이꼬마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역사는 12.12 군사정변입니다. 12.12 군사반란, 12.12 숙군 쿠데타, 12.12 군사정변이라 불리는 사건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대 내 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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