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꼬마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역사는 10월 유신입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를 다룬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합니다.
1972년 12월 27일에 제3 공화국 헌법을 개정했는데 이를 유신 헌법이라 하며 유신 헌법이 발표된 후 체제를 유신 체제라고 부릅니다.
이는 국민들의 민주주의 정신을 반하는 정책이었으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의 목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유신헌법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모든 법관과 국회의원의 1/3을 임명할 수 있으며 긴급조치권, 국회해산권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임기 6년에 횟수의 제한 없이 연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됐던 박정희 대통령이지만 이러한 헌법 개정은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독재주의 체제에서 이용하는 헌법입니다. 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지만 대통령의 권한이 매우 강해 재임하기 위한 헌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대통령 선출 방식이 국민이 투표하는 직접 선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제로 바뀌었습니다. 간선제란 국민이 뽑은 대리인에 의한 선거입니다. 규모가 큰 미국에선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접선거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신헌법을 통한 유신 체제는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모두 장악할 수 있는 대통령이 종신 집권 할 수 있도록 설계된 헌법개정이었습니다.
1. 박정희의 '10월 유신'
1972년 10월 17일 특별선언, 비상선언, 비상조치, 유신적 조치 등으로 불렸지만 10월 27일 '10월 유신'으로 명칭을 통일하였습니다. 이 명칭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인용하였습니다.
2. 10월의 대통령 특별선언
특별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1972년 10월 17일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에 의하여 수행되며, 비상국무회의 기능은 현행 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 투표에 붙여 확정시킨다.
-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 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 질서를 정상화시킨다.
3. 유신 헌법이란?
7차 개정 헌법, 유신헌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972년 12월 27일부터 효력을 가졌습니다.
- 대통령 직선제의 폐지 및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 선거를 시행한다.
-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한다.
- 대통령에게 헌법 효력까지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한다.
- 국회 해산권 및 모든 법관 임명권을 대통령이 갖도록 하여 대통령이 3권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 제한을 철폐하여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한다.
4. 유신의 역사
1961년 5.16 혁명 이후 1963년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대통령에 재선 되었습니다. 이 당시 제3 공화국 헌법은 1차에 한하여 대통령 중임이 가능했습니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을 통하여 1971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습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번 더 기회가 달라하며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였지만 상대 후보인 김대중은 "박정희가 헌법을 고쳐 선거가 필요 없는 총통이 되려 한다"며 반발했습니다.
그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40% 중반의 표를 획득하며 박정희 대통령과 접전을 달렸습니다. 가까스로 3선에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유신헌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쳤습니다.
11월 21일 유신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는 투표율 91% 중 91.5%의 찬성표를 획득하여 12월 27 날 정식 공포되었습니다.
유신 헌법안이 국민투표로 통과한 후 대학에 대한 휴교조치를 해제하였으며, 12월 14일 계엄령을 해제하였습니다.
비상계엄이 해제한 다음날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2359명의 대의원이 선출 되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단독입후보하여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습니다.
5. 재신임 투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체제에 대한 논란이 전국적으로 가열되자 특별담화를 통해 유신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였습니다.
이는 대통령에 대한 신임투표로 봐도 무방했습니다. 그리하여 1975년 2월 12일 유신 헌법에 대해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며 유권자의 80%가 투표에 참여하여 찬성 73%, 반대 25%로 유신 헌법은 형식적으로 재신임을 받았습니다.
6. 유신 체제에서의 저항
박정희는 본인의 유신 체제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하였으나 국민들은 민주정치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지속해서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국민들이 많아지며 일부 학생들은 전국적인 시위를 감행하였습니다.
언론인들 조차 자유언론수호투위를 결성하는 등 지속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1974년 11월 야당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은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후보를 제거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울 1973년 8월 납치한 후 자택에 연금시켜 국내외를 막론하고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1974년 교수, 학생, 언론인, 종교인 등 민주인사들을 투옥하거나 보직 해임시켰습니다. 1975년 8월엔 민주주의의 등불이라 불리던 장준하가 등산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며 유신 체제에 반하는 시민들이 많아졌습니다.
유신반대운동이 고조되던 1974년 8월 15일 광복절행사에서 문세광이 박정희를 저격하였고 그 유탄에 박정희 대통령의 아내인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였습니다.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이를 빌미로 각 대학에 학도호국단을 조직하여 민방위대를 창설하는 등 군사통치를 강화하였습니다.
공화당 내부에서 장기독재에 대한 부담으로 이탈하는 인사들이 속출하였으며 미국에서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박정희 대통령에겐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제2차 오일쇼크가 나타나며 박정희 대통령 주도로 이끌던 중공업 중심의 국내 경제가 타격을 입으며 박정희의 정권 유지가 실패될 가능성이 점두 되었습니다.
7. 유신체제의 마지막 부마항쟁
박정희의 유신체제의 종말은 부마항쟁에서 가속화되었습니다. 1979년 야당인 신민당 당수인 김영삼이 적극적인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자, 박정희는 국회에서 김영삼을 제명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국내외 여론은 더 안 좋아졌으며 대규모 저항운동이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를 우리는 부마항쟁이라고 부릅니다.
이를 두고 박정희의 최측근이었던 중앙정보부부장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이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유신체제는 끝이 나며 합동수사본부징이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하나회를 중심으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대한민국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아래의 포스팅을 확인하시면 10.26 박정희 피격사건과, 12.12 군사정변에 대해 자세하게 나와있습니다.
[역사 캘린더] 10.26 사건 박정희 피격 사건에 대해서
[역사 캘린더] 10.26 사건 박정희 피격 사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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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캘린더] 12.12 군사정변에 대해서
안녕하세요 이꼬마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역사는 12.12 군사정변입니다. 12.12 군사반란, 12.12 숙군 쿠데타, 12.12 군사정변이라 불리는 사건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대 내 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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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신의 평가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유신 체제는 전형적인 독재체제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에서 대통령 1인이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를 장악하여 삼권분립이 없어졌으며 무제한의 연임 허용은 독재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전국의 모든 법관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함으로써 사법권은 대통령 손아귀에 있었으며 국민은 대통령선거권은 빼앗겼습니다.
대통령은 헌법 효력까지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함을 부여받아 언제든지 유신체제에 반하는 인원들을 처단할 수 있었기에 국민의 기본권은 침해되었다고 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는 국군의 장병들이 우수하다는 사실에 대해 정신교육 교범을 작성했는데 박정희가 모두 망쳐 놓았다며 유신헌법으로 남한의 우수성이 사라졌다며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하였습니다.
10월 26일 사건으로 박정희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불안한 남북관계 속 정치적 사건으로 대한민국은 혼란을 야기시키는 정권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일각에선 남한과 북한의 신경전, 간첩, 정치 등 안정적인 대한민국이 아니기 때문에 강력한 정치를 하지 않으면 나라의 존폐가 어려웠을 거란 이야기도 있지만 국민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정책들은 비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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