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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캘린더] 1.21 무장공비 사태 - 김신조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by 이꼬마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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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캘린더] 1.21 무장공비 사태 - 김신조"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역사캘린더] 1.21 무장공비 사태 - 김신조"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안녕하세요 이꼬마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역사는 1.21 무장공비 사태입니다.

1.21 사태는 북한의 김일성의 명령으로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입니다.

1월 17일 휴전선을 넘은 무장공비는 청와대 앞 500m까지 진출하였습니다. 하지만 근처에 있던 경찰의 불시검문에 불응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무장공비들은 그대로 도주하였습니다.

이들을 잡기 위해 비상경계태세가 발동되고 경찰과 군인이 합동 소탕작전을 펼쳐 31명 중 29명이 사살되었으며 1명은 북한으로 달아나고 나머지 1명이 생포되었습니다.

체포과정에서 민간인 포함 30명이 사망하였으며 52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계기로 육군 3사관 학교, 전투경찰대, 향토예비군 그리고 유명한 684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과정엔 교련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대통령의 경호가 강화되었습니다.


1. 1.21 사태가 발생한 이유

북악산에 있는 1.21 사태 사진, 소나무와 바위에 있는 총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북악산에 있는 1.21 사태 사진, 소나무와 바위에 있는 총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미국은 베트남과 전쟁 중 한국에 참전을 요청하였습니다. 한국은 1965년 파병을 시작했으며 약 5만 명 정도의 파병인원을 유지했습니다.

파병에 따른 미국의 경제지원은 받았으나 국군의 전력은 약화된 상태였는데 북한은 이를 좋은 기회라 판단하여 대남공작을 적극적으로 펼쳤습니다.

비무장지대에서 도발을 일삼으며 어선들을 납치하고 650톤 해군 경비함이 북한의 해안포 공격으로 격침되는 사건도 발생하였습니다. 이는 56함 침몰 사건이라 부릅니다.


2. 북한 124부대

북한의 124부대 무장공비 김신조의 암살 루트
북한의 124부대 무장공비 김신조의 암살 루트

북한의 124부대는 적극적인 유격전을 하기 위해 1967년 4월에 창설된 게릴라전 특수부대입니다. 엄선된 정예병 24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300명씩 분산되어 집중 훈련을 받았습니다.

김일성은 1월 13일 최종 목표로 청와대를 설정하였으며 정예선발 31명을 보내 박정희 대통령 암살 지령을 내렸습니다.

남파 특공대는 한국 국군 복장으로 위장한 후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해 개성에서 출발하였습니다. 1월 18일 새벽에 휴전선을 넘었으며 임진강을 건너 21일 밤 9시 30분경 청와대 인근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청운동 세검정 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며 저항한 후 도주하였습니다.


3. 무장공비 소탕작전

남파공작 31명 중 유일하게 생포한 김신조. 체포당시 모습이다.
남파공작 31명 중 유일하게 생포한 김신조. 체포당시 모습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경계태세를 세우고 군경을 출동시켜 소탕작전을 펼쳤습니다. 도주한 무장공비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1월 31일까지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대, 경찰과 함께 합동수색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북한의 124부대 31명 중 29명이 사살되었으며 1명은 투항, 1명만 북한으로 도주하였습니다. 투항한 1명이 김신조이며 그를 통해 남파사실과 침투목적들을 알게 됩니다. 현재는 국내에 귀화하여 목사로 지내고 있습니다.

투항 당시 김신조는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외치며 잔인함에 국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4. 북한의 입장 표명

1.21 암살 사건이 실패한 북한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발표하며 시신인수를 거부하였습니다. 124부대는 우리에겐 적이었지만 당의 지령에 선동되어 안타까운 젊은이들이 이용된 것입니다.

자기의 소행이 아니라던 김일성은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중앙당 연락국장 이효순, 민족보위상 김창봉, 총참모장 최광, 대남공작총책 허봉학 등을 숙청하였습니다.

북한의 남파공작은 이로 끝나지 않았으며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 호를 납치했으며 그해 10월부터 11월까지 울진, 삼척 지역에 120명의 무장공비를 침투시켰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남파공작으로 우리 정부는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깨달아 육군 3사관학교와 예비군이 창설되었으며 고등학교, 대학교에 교련 교육이 실시되었습니다.

또한 김일성 암살의 목적을 가진 684부대를 창설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긴장완화 평화정책으로 불발되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작전권 환수를 처음 요구하였습니다.


5. 김일성의 사과

7.4 남북공동성명 때 이후락과 김일성
7.4 남북공동성명 때 이후락과 김일성

김일성은 19772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가진 비밀회담에서 1.21 사태는 자신의 의사가 아니었으며 내부 분탕분자가 한 짓이라며 시인한 후 사과했습니다.

유일하게 북으로 도망친 조선인민군 대장 백재경은 총 청치국 부총국장을 역임하며 2000년 청와대에 와서 김대중에게 송이버섯을 선물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1965년에 제2차 한국 전쟁을 이르키려 했지만 중국의 반대로 무산됐던 기록이 있습니다.


예전의 한국전쟁 직후 국내의 정세는 매우 불안정하였으며 각종 도발들과 간첩들이 판을 쳤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 요즘 국내에 간첩이 누가 있냐 하지만 아직도 국내엔 많은 간첩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국가 안보를 신중하게 생각하며 올바른 가치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도 국내 상공에 무인정찰기를 보낸 북한의 소행들을 보면 한민족이라기 보단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만 노리는 북한이 달갑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이상 1.21 무장공비 사태, 김신조 일당에 대한 정보였습니다.
올바른 가치관으로 모두 민주주의 시민이 되었으면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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