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이꼬마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역사는 3.1 운동입니다.
3·1 운동이란 3·1 만세운동,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이라 불리며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해 1919년 3월 1일 한일 병합 조약의 무효와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한 것을 의미합니다.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장례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퍼진 운동입니다.
규모가 매우 크며 현재까지도 영향력이 있어 3·1 혁명이라고도 불리기도 합니다.
1. 3·1 운동의 규모

3·1 운동은 민족 대표 33인을 주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뒤에 구속되거나 재판에 서게 되었습니다.
약 3개월 정도 시위가 유지되었으며 조선 총독부는 이를 강경하게 진압하였습니다.
공식 기록에는 집회인 수는 106만 명이며 그중 사망자는 900여 명, 구속된 사람은 4만 7천여 명이었습니다.
1919년 조선은 1678만 8400명이었으며 전체 인구 중 2.76%가량이 3·1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3·1 운동을 통해 처음으로 1919년 4월 11일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3·1 운동은 우리에게 있어 건국의 기원입니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도 3·1 운동은 건국의 기원이며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이 천명되어 있습니다.
2. 3·1 운동 전개

당시 육군대장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총독으로 계승된 무단 통치는 3·1 독립운동을 발생하게 만들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전후 원칙 중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민족자결주의를 언급함으로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은 희망을 가졌었습니다.
( * 파리강화회담이란 프랑스 파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 포함해 27개국 대표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뒤처리를 의논하기 위해 연 회의를 뜻합니다. 그중 파리위원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 호소 및 독립 청원 목적으로 프랑스 파리에 설치한 외교부서입니다.)
일부 독립 운동가들은 1918년부터 독립운동을 치밀하게 계획했으며 파리 강화회의에 우리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선 소요사태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세계정세와 갑작스럽게 사망한 고종황제의 죽음은 3·1 운동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3. 3·1 운동 사전 준비

중국에서 유학 중이던 여운형과 신규식은 파리 강화 회의가 조선의 독립에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란 판단에 신한청년당이라는 단체를 문서로 조직해 불어를 잘하는 김규식을 파견하고 조선에는 장덕수를 파견합니다.
여운형은 중국 길림과 만주에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파리 강화 회의의 소식과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1919년 김규식은 상하이에 있는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독립 시위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3·1 운동의 초석을 다지게 됩니다.
때마침 고종의 죽음은 조선 내에 일본인들이 고종을 독살하였다는 이야기가 돌아 만세 시위 확산을 가져왔습니다.
4. 3·1 운동 핵심 독립선언서 낭독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현재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서 조선은 독립국임을 선언하였습니다.
이들은 총독부 정무총감인 야마가타 이자부로에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리고 태화관임을 알렸습니다.
사실상 민족대표 33인은 본인들을 잡아가라고 위치를 알렸으며 일본의 헌병과 순사들은 민족대표를 연행하였습니다.
아래는 독립선언서 한글 내용입니다.
[독립선언서]
1.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2. 반만 년이나 이어 온 우리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서 이 선언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민족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니, 이 독립 선언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민족 자결주의에로 옮아 가는 시대의 큰 형세이며,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갈 권리를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직임이므로, 천하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이 독립 선언을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였을 당시 300m 정도 떨어진 탑골공원엔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모인 학생은 천명 이상이 모였으며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여기저기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외침은 물결처럼 성안과 지방의 백성들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위행진은 서울을 8개 구로 나누어 길을 가면서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며 "일본군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대한독립만세", "조선 독립정부를 수립하라!"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한 학생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대한독립을 쓰니 미국영사관은 문을 열어 이들을 환영하였습니다. 일본 헌병과 기마병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했지만 군중들은 물러서지 않다 6시가 되어 자진해산하였습니다.
다음날 조선총독부는 독립단체를 수색하고 체포하였는데 그 숫자는 1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서울에서의 3·1 운동의 시작은 4월 30일까지 60일 동안 1214회의 만세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5. 3·1 운동의 영향

3·1 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며 19세기부터 이어져 온 국가 수립운동이 첫 결실을 맺었습니다.
삼일운동을 통해 한 민족이 독립을 향한 마음이 서로 일치함을 확인하였으며 독립운동가들의 구체적인 성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세계에 한국의 독립의지를 전파하며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은 이런 한국의 뜻을 받아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46년 3월 1일은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며 1949년 10월 1일 국경일로 공포되었습니다.
6. 3·1 운동 주역

- 신한 청년당 -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다.
- 상하이 임시정부 - 만세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망명 정부
- 유관순 -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하다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아 향년 17세에 사망하였다.
- 김규식 -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되었으며 3.1 운동의 초석을 다졌다.
- 여운형 - 신한청년당 당수로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였다.
- 김향화 - 수원 만세운동을 주도한 기생
- 정칠성 - 경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기생
- 김순애 - 신한청년당 비밀연락원으로 파리강화회의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였다.
- 신태윤 - 유관순과 만세 운동을 조직하였으며 태형 처분받았다.
- 신익희 - 윤치영, 이광수 등과 2.8 독립 선언을 주도하였다.
- 임영신 - 공주와 천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여교사
이상 3.1 운동에 대한 역사였습니다. 과거 선대들의 노력이 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모두 올바른 역사 가치관을 통해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지키는 민주시민이 되었으면 합니다.
읽어주신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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