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캘린더

[역사 캘린더] 12.12 군사정변에 대해서

by 이꼬마 2022. 12. 21.
반응형

[12월 역사 캘린더] 12.12 군사정변에 대해서
[12월 역사 캘린더] 12.12 군사정변에 대해서

안녕하세요 이꼬마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역사는 12.12 군사정변입니다.

12.12 군사반란, 12.12 숙군 쿠데타, 12.12 군사정변이라 불리는 사건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정병주, 수도경비사령부 장태완, 육군 헌병감 김진기 등 군대 지휘관들을 체포한 사건입니다. 

10.26 박정히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배후에 대해 조사하면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아래의 게시글은 10.26 사건에 대해 자세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0.26 사건 박정희 피격 사건에 대해서

 

[역사 캘린더] 10.26 사건 박정희 피격 사건에 대해서

안녕하세요 이꼬마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역사는 10.26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건입니다.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흥주, 박선호, 경비원들과 공작해 박정희 대

allofmyinfo.tistory.com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으로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올라섰습니다. 그 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은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5.17 쿠데타에 반항한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을 진압과 학살로 강경 대응하였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8월 22일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여 1980년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 12.12 군사정변 사건 개요

쿠데타가 끝난 후 행동대장들이 국군 보안사령부 앞에서 찍은 사진. 왼쪽에서 5번째가 전두환이다.
쿠데타가 끝난 후 행동대장들이 국군 보안사령부 앞에서 찍은 사진. 왼쪽에서 5번째가 전두환이다.

10.26 박정희 대통령 피격사건 이후 군 수뇌부들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중심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결의하였습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10.26 박정희 대통령 피격사건을 수사하였습니다.

10.26 사건 당시 정승화는 현장에 가까이 있었고 박정희를 시해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의혹이 있었습니다.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친 후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전두환은 "정승화 참모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해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 이야기했습니다.

만약 정승화 총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의 말을 듣고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야기되었을 것입니다. 중앙정보부로 간다는 것은 정권을 장악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승화는 육군본부로 가자 이야기하여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일본에선 소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의 최고 실권자라고 발표하며 국방장관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동해 경비사령관으로 전보, 좌천 시킬 것을 건의하였으나 일반 시민들에게 수사와 관련된 의혹을 받을 수 있어 전보 발령을 유보시키게 됩니다.



2. 12.12 군사정변의 전개 과정 

전두환 보안사령관 모습
전두환 보안사령관 시절 모습


하나회 집결 → 육군 참모총장 납치 → 정승화 총장 연행 조사 재가 요청 → 군 통수권으로 진압군 저지 → 진압군 주도력 상실 → 미국 입장 → 반란군 입장

1)  하나회 집결

전두환은 11월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학할 계획을 세웁니다. 국대 내 사모임인 하나회를 비롯해 세력들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보안사령부 비서실장 허화평,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허삼수, 보안사령부 수사과장 이학봉, 제30 경비단장 장세동, 제33 경비단장 김진영 등 영관급들이 하나둘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11월 말 전두환은 제1군단장 황영시, 제9사단장 노태우, 제71방위사단장 백운택, 제 1 공수특전 여단장 박희도, 제 3 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제 5 공수특전여단장 장기오 등과 쿠데타를 모의하였습니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은 일과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연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계획서를 전달받고 허삼수와, 우경윤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12월 12일 전두환은 세력들을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 경비단 단장실로 모여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날 18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목욕 시간을 피해 20분 일찍 오라는 전갈까지 받고 육군 참모총장 체포안에 대한 재가를 비밀로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합니다.


2) 육군참모총장 납치

정승호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전두환의 지시를 받았던 허삼수와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시켰습니다.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 헌병대 50명을 투입하였으며 33 헌병대는 해병대 병력이 경비하던 공관 내에 일제차 1대와 버스 1대를 타고 들어와 보안사 차장의 보고라며 손님 대접까지 받으며 거실에서 대기합니다.

계엄사령관에게 뇌물 수수 혐의를 거론하여 총리 공관으로 확인 연락을 하려던 인원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으며 공관 내부를 제압하였습니다.

사복  차림의 두 대령은 총장을 양쪽으로 잡아 일으켜 압송합니다. 그때 공관 경비 해병대원들과 33헌병대는 총격전을 치릅니다. 하지만 경비 헌병들은 이를 제지하지 못하였으며 총구가 뺨에 닿아 있는 상태로 총장은 강제 연행되었습니다.

계엄사령관 공관에서 모두 3명이 사망, 20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3) 정승화 총장 연행 조사 재가 요청

전두환, 유학성, 황영시는 국무총리 공관으로 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의 연행·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사후 결재이기 때문에 거절당했지만 결재와 관련한 의견들로 밤을 새우게 됩니다.

하나회를 통한 신군부 세력은 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 사령권 이건영,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등에 대해 하극상을 감행하였습니다.

모두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하였습니다. 제1 공수특전여단, 제3 공수특전여단, 제5공수특전여단이  서울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시내는 군부대가 점령해 국방부에서 총격이 났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대통령은 결재가 불가능하여 국방부 장관의 결재가 없으니 국방부 장관을 데려오라고 요구합니다. 전두환은 새벽 2시에 몇 번씩 결재를 요구하는 가운데 사단 병력에 움직임이 보고되어 대통령은 사단장 노태우 소장에게 원대 복귀를 명령합니다.


4) 군 통수권으로 진압군 저지

내란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양측의 접촉을 총리공관에서 막았습니다. 하지만 국방부장관은 대치 상태를 이유로 총리공관으로 가기를 거부합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국방부 장관에게 연락하여 총리가 가면 국방부 장관이 오는 것으로 대통령은 확답을 받습니다.

노태우 소장은 9사단 29 연대를 중앙청 앞에 집결시켰습니다.

1 공수특전여단은 제1한강교에서 차단되어 회군하던 도중 행주대교에 있던 30사단 병력을 무력화 시킨 후 서울로 진군하였습니다. 1공수특전여단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공격하여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였습니다.

국방부 청사에 도착한 총리는 노재현 국방부장관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데리고 갑니다.


5) 진압군 주도력 상실


3 공수특전여단은 10여 명의 체포조가 투입되어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을 사살하며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체포합니다.

3 공수에서 차출된 정예 병력이 특전사령부 지휘통제실에 1주일 가까이 점령하여 특전사령부의 기능을 정지시켰습니다.

전두환의 의도대로 사태는 일단락되었으며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세 차례 걸쳐 사후 재가가 이루어졌습니다.

12월 13일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담화문을 통해 10.26 사건 연류 혐의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고 이와 연관된 일보 장성들까지 구속되었으며 계엄사령관직에 이희성 육군 대장을 임명되었음을 발표하였습니다.

12.12 군사정변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희성을 직접 임명하고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최고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6) 미국 입장

미국은 12.12 군사정변 후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높다 판단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신군부가 평시 작전통제권 행사와 관련한 한미 간의 합의를 위반한 것에 대해 강력한 불만을 전달하며 민간 정부만을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합니다.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과 긴장감이 고조되었지만 보름 뒤 비반의 강도가 누그러지면서 군부 내 반란을 사실상 묵인하였습니다.


7) 반란군 입장

12월 12일부터 다음날까지 총리의 공관에는 반란군 측의 지휘관들 중 일부가 있었습니다. 서울은 군부대가 장악을 하고 국방부에서 총격전이 일어난 상황에 이제 내란 상태를 막을 길은 없다며 국군 통수권자의 공관에서 의견을 내세웁니다.


3. 12.12 군사정변 이후

12.12 사건은 숙군 목적을 가진 군 내부의 반란이었습니다. 정권을 탈취하는 의미의 쿠데타는 1980년 전국 비상 계엄령으로부터 5.18광주민중항쟁, 5.17 쿠데타였습니다. 결국 12.12 군사정변 이후 최규하를 사임시키고 신군부가 실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전두환은 보안사 사령관과 중앙정부 부장으로 겸직 임명되었습니다. 12월 20일 계엄보통군법회의 1심과 1980년 1월 21일 2심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체포된 정보부장과 정보부 박선호 의전과장을 비롯한 직원 6명은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1980년 1월 군 장성들은 대대적인 인사 교체가 있었으며 공석, 사석에서 12·12 군사 반란에 대하여 비판적인 발언을 했던 장성들은 옷을 벗거나, 보직이 변경되었으며 신군부가 정권 장악의 준비가 갖추어졌습니다. 미국과의 관계는 신군부의 뜻대로 쉽게 풀리지 않았으며 주한 미군 사령관은 군사 반란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와 같은 군부 체제를 형성하려는 신군부에 대해 저항하여 5월부터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1980년 5월 17일에 군사 쿠데타에 의한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5월 18일부터 이에 반대한 광주 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였습니다. 박정희 피살 관련자들은 5월 24실 대법원 판결 확정 후 즉결심판으로 처형되었습니다.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은 군부의 압박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으며 8월 27일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 이후 국가보안위원회는 헌법을 개정하여, 제5 공화국이 성립되었습니다.


이상 12.12 군사정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꼬마 배상

반응형

댓글